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디 아민 (문단 편집) == 기행 ==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쳐서 요리를 만들어 외교 사절에게 권했고, 각료회의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이 있으면 즉석에서 뺨을 때리는가 하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다리 밑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또 아민은 엔테베 사건의 여파로 영국이 우간다와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때인 1977년에 자신을 '[[대영제국]]의 정복자'로 선포하고는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군주이시며,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이신 종신대통령 원수 알하지 이디 아민 다다 박사 각하(His Excellency, President for Life, Field Marshal Al Hadji Doctor Idi Amin Dada, VC, DSO, MC, CBE, Lord of All the Beasts of the Earth and Fishes of the Seas and 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in Africa in General and Uganda in Particular.)''''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우간다 국민들은 이 호칭을 막힘 없이 외워야만 했으며, 이를 못 외운 측근들은 당연히 처형 당했다. 그리고 아민은 거의 문맹이었는데도 마케레레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셀프 수여하기도 했다.[* 마치 거의 문맹이었는데도 저명한 [[화학자]]를 자칭한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 [[파일:attachment/b0041991_4b50334bd34fa.jpg|width=100%]] || || 1975년 7월에 캄팔라에서 열린 외교관 파티에서 아민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영국인 사업가들 || 아민은 아프리카 통일기구 수뇌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자신이 백인들을 굴복시켰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간다 내에 있던 백인 사업가 6명을 잡아다가 노예로서 자신의 가마를 들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과 [[스웨덴]] 국적의 사업가들로, 아민이 우간다 내의 그들의 사업권을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자신의 가마를 들고 양산을 받쳐들게끔 강압적으로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의 취재에 응할 때는 당시 사건에 대해 '''"나는 [[백인의 짐|백인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고. 지금도 이 사건은 이디 아민 하면 거론되는 [[명불허전|꽤나 유명한 기행]] 중 하나라고 한다. 위 사진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들이 반대로 당하는 것'''이라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자랑거리'''로 알려지기도 했다. 가마를 드는 것이기 때문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상술했듯 이디 아민은 193cm에 100kg을 훌쩍 넘는 거구인지라 사업가들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아민의 가마를 들었던 백인 사업가 중 한 명인 로버트 스캘런은 후에 아민과 사업 문제를 두고 다투다가 아민에게 쇠망치로 맞아 죽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의(1975.7.28~8.1) 당시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복을 한답시고 [[빅토리아 호수]] 인근의 섬을 '''[[케이프타운]]'''이라고 명명한 뒤 폭격을 자행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때 폭격이 실패하자 아민은 해당 부대 지휘관 겸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전 공군 참모총장을 그 포격지에 묶어놓고 재폭격을 실시하고, 그렇게 참모까지 처형시키면서 성공시켰다. 또한 [[이스라엘]]과 단교했을 때에는 관저 뒤뜰 너머에 언덕을 만들어 ''''[[골란 고원]]''''이라 이름 붙인 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는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http://nestofpnix.egloos.com/4319247|참고 자료]]. 아민은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기도 했으며, 1975년 6월 9일에는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인 강사 데니스 힐즈(Denis Hills, 1913~2004)가 자신에 대해 '검은 [[네로]]', '공포로, 마을의 폭군처럼 통치한다'으로 묘사한 원고를 쓰자 반역죄로 기소한 후 군사 재판소를 거쳐서 힐에게 공개 총살형 선고를 내렸으나,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제임스 캘러헌]]의 우간다 방문 때문에 감금 1달 후인 동년 7월 9일에 풀어준 적도 있었다. [[https://www.nytimes.com/1975/09/07/archives/the-jailer-as-seen-by-his-exprisoner.html|1975년 9월 7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힐즈의 회상]]. 거기다가 아민은 1974년에 [[엘리자베스 2세]] 대신 [[영연방]]의 수장이 되겠다며 '우간다가 지구의 지리적 심장부'라는 근거를 들며 '''[[허경영|UN 본부를 우간다로 옮겨야 한다]]'''는 말도 한 적이 있고, 심지어 어느 날에는 갑자기 '''미국에 전쟁 선언을 한 뒤, 바로 다음 날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3040032920301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3-04&officeId=00032&pageNo=3&printNo=9671&publishType=00020|아민의 기행에 대한 1977년 3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 게다가 친나치 성향이던 아민은 '독일에 히틀러의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캄팔라에 [[아돌프 히틀러]]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만류해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